중국여행/강소성江苏省

난징(南京)이야기

아창 2017. 6. 30. 15:24

십년전에 일때문에 갔다온 난징은  꽤나 더운지역으로 알고 있었다. 중국에 3대 화로 라고 말한다.

이번에는 작은누이가 청도에 와서 난징에 일이 있다고 해서 또 나의 애마 롯시란테를 끌고 다녀 왔다.


난징은 중국 장쑤성[]의 성도 ().이다.그리고 또한 중국에서 보면 아픈 역사의 상징이기도 하다.

난징은 옛 중국의 오랜 역사의 도시였다.오()·송()·양() 등의 도읍지였으며,

일찍이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초(楚)나라의 금릉읍(金陵邑)이었던 곳으로 삼국시대(三國時代)인 229년에 오나라의 손권(孫權)이

건업(建業)이라고 개칭하여 이곳에 도읍을 정한 뒤부터 강남(江南)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진(晋)나라 때 건강(建康)으로 개칭하여 지방의 치소(治所)로 삼았으나,

다시 318년에 동진(東晋)의 원제(元帝)가 도읍한 뒤, 계속해서 송(宋)·제(齊)·양(梁)·진(陳)의 4대에 걸쳐

남왕조(南王朝)의 국도가 되어 남왕조 문화의 중심지로 번영하였다.

589년 진(陳)이 수(隋)에 의해 멸망되면서 도읍지 건강도 파괴되었다.

당(唐)나라 때에는 금릉(金陵)·백하(白下) 및 금릉부 등으로 불리다가

오대십국(五代十國)의 이변(李昪)이 강녕부(江寧府)로 개칭(937)한 뒤 남당(南唐) 20여 년의 도읍지가 되었다.

남송(南宋) 때에 건강부(建康府), 원(元)나라 때 집경로(集慶路)로 불리다가,

1368∼1421년에 명(明)나라 도읍지가 되어 처음에 응천부(應天府), 뒤에 남경(南京)으로 불렀다.

현재의 난징의 명칭은 그때에 비롯되었으며, 현존하는 주위 34km의 성벽도 그때에 축조되었다.

1441년에 도읍지가 베이징[北京]으로 옮겨진 뒤에는 배도(陪都)로서 중시되었다.

청(淸)나라 때에는 강녕부(江寧府)로 불리고, 1853년부터 12년간 태평천국군(太平天國軍)이 점령하여

천경(天京)으로 불렀으나 전란으로 황폐해졌다.


1842년에는 아편전쟁 후의 난징조약[南京條約]이 이곳에서 체결되고, 1858년 톈진조약[天津條約]에 의해 개항장(開港場)이 되었다.

신해혁명(辛亥革命)의 결과 1912년에 중화민국(中華民國) 임시정부가 여기에 수립되고,

1927년 수도가 되어, 특별시제(特別市制)가 시행되었다.



난징에 가면 꼭 들려야 될곳이 두곳이 있다.

하나는 공자묘(夫子庙푸즈묘), 이고 또 한군데는 남경대학살기념관이다.

이 두군데를 안가본다는것은, 남경을 보았다고 할수가 없을것이다.

푸즈묘는  부자는 공자를 존경하는 공부자에서 온말이고, 묘는 사당이다.
난징에서 가장큰 공자사당이다. 이곳의 대성문을 들어가 만나는 대성전의 크기와 위용에 놀란다.

그 앞에는 공자상이 있다.우리나라에도 오산등의 향교에는 공자상이 있는곳도 있다.

부자묘는 공묘라고도 한다.모두 같은말이다. 우리나라 200여개 향교를 모두 둘러보면, 모두 대성전이 있다.

바로 그런 대성전의 원조라 할수 있는것이다. 크기와 규모가 향교의 그것과 비교되지 않는다. 유교의 나라를 실감할수 있다.

그리고 푸즈묘는 낮보다는 밤의 야경이 훨씬 아름다운곳이다. 먹거리도 풍부하나 가격은 일반적인곳 보다는 훨씬 비싸다.ㅠㅠ


푸즈묘 입구이다.차량이 진입할수 없는 곳이기에 많은 인파가 야경을 즐길수 있는곳이다.

같이간 누이는 탈이나서 하루종일 호텔에 누워있고 나혼자 거리를 나섰다.

보행가 거리에는 주말이어서 그런지 많은 인파가 쏟아져 나와 제대로 된 야경사진을 촬영할수가 없었다.

멋진 야경보다 사람을 촬영한다는것이 맞을성 싶다.ㅠㅠ

보석방 같은곳인데 밖에서 직접 은을 가공하고 있다. 수공으로 무늬나 이름을 새겨 주고 있다.


강소성은 물의 도시이다. 그많큼 운하가 발달되어 관광객의 발걸음을 잡고 있다.

돈내어 놓으라고 ㅋㅋㅋ

화려하게 수놓은 많은 조명과 대비 되는 밤과 낮을 촬영해보았다.

같은 장소인데, 역시 낮은 좀 썰렁한 느낌이 난다. ㅋ




가까운 거리를 인력거를 타면서 관광하는 사람이 있을까?  정답: 있다. ㅋㅋㅋ

푸즈묘에는 많은 먹거리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망과쥬스 이다 여기를 보면 대만이 생각이 난다.

청도로 돌아가기가 못내 아쉬워 난징대학살 기념관을 찾었다.

차를 주차 시키고 난후 거리 푯말에 난징 무료박물관이라고 쓰여 있어,무조건 들어가 보았다.

중국에는 절대로 공짜가 없는데 이상하다 싶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비단을 짜는 모습과 옛 왕들이 입었던 비단옷을 전시 해놓았다.

코스를 돌면 비단제품을 파는 곳이 나올것이다 생각 했는데 나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었다.

옛 중국의 황제가 앉었던 곳이란다. 나도 한번 앉어 볼까나? 어떤 기분이 들지?

중국의 큰 건물에는 항상 사자상이 놓여져 있다.물론 나의 중요한 피사체이기도 하다.



드뎌 난징 대학살 기념관에 도착을 하였다.

그런데 이곳은 일주일중 월요일은 개방을 하지 않는다. 물론 알고는 왔지만 들어가 보지 못하는것이 넘 억울하기만 했다.

월요일날 개방을 하지 않는것이 너무 이상하기만 했다.

죽은 아이를 안고 울부짖는 어머니 상이다.

조각상앞에서  이렇게 숙연하게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다.

살려고 달아나는 모습일까? 아니면 일본군 앞에서 기어서라도 도망을 가는 모습일까?

남경대학살 사건은 1937년 12월∼1938년 1월 일본군이 당시 중국의 수도 남경으로 진격하면서

약 30만 명을 살해하였고,남경 점령 뒤에 약 4만 2000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전후 극동 군사재판에 제출된 자료에 따르면, 2개의 자선단체가 남경에서 매장한 유기시체만도

15만 5337구(그 중 어린이가 859구, 부녀자가 2,127구)였고, 그밖에 양자강에도 많은 시체가 버려졌다.

전후 극동 군사재판에서 당시의 총사령관인 마쓰이가 이 대학살의 책임자로서 사형에 처해졌다.

남경대학살 기념관은 남경대학살을 증언하는 사진과, 생존자의 증언, 후에 발굴된 인골들을 그대로 전시해 놓은 곳이다.

흰 콘크리트 묘처럼 생겨 있어서 다소 삭막하게 느껴지는 감이 있지만 그때의 생생한 사실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역사체험관이다.

30만명이라는 숫자가 어림잡어 상상이 안간다. 어떤 현대 전쟁에서도 이렇게 한곳에서 많은 전사자가 나지 않는 법인데

한도시에서 30만명을 죽일수 있을까? 일본사람 ..., 일본놈....,. 나쁜시키들....,

그리고도 지금 현재 난징대학살을 일본은 인정하지를 않고 있다.

마치 위안부를 인정하지 않고 돈을 위해서 매춘을 한것이라고 떠들어 대는것 처럼...,

언제나 되야 그들은 진심으로 사과하고 속죄를 할까?

내마음을 이해하듯 거리에 이쁜 채송화 꽃이 나를 반긴다.


미국에 자유의 여신상이 있듯이 기념관 한쪽에 아이를 들고 한손에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를 날리는 듯한 동상이 서있다.

아마 자유와 평화를 의미하는 동상일것이라 혼자 추측을 해본다.

중국은 이제 미국과 견줄수 있는 거대한 대국으로 변모 해왔다.

아픈 상처를 털어내고 전세계 경제와 군사권에서 G2에 들어 갈정도로 빠르게 성장해왔다.

100년전 서구 열강과 일본의 지배에 맞서 이제는 진정 대국이라고 할수 있을정도로 발전을 한것이다.

그러나 약자 였을때의 설음을 잊고 지금 초강대국이 되었을때,  역사가 반복되듯 다시 또 우리나라를 괴롭히고 있다.

사드는 국가적인 정책이다. 국가간의 일갖고 온갖 경제적 봉쇄를 다하고 있다.

중국에서 오래 살어온 나의 개인적인 소망은 중국과 한국이 정말로 천년만년 우호적인 국가로 발전되어

양국이 서로 윈윈하는 상호발전적인 관계로 끝까지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강자의 위엄이 아닌 강자의 너그러움으로 작은 나라를 상대했으면 좋겠다.